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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 실장을 소개 합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다홍남북결혼
조회
1,199회
작성일
23-01-25 17:31

본문

 

 

 


<남부러울 것 없는 어린시절>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독 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아빠였다. 육아 양육과 교육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대한민국과 달리 아무런 육아 교육 매체나 정보 지식이 없고 사랑 표현마저 어색한 북한에서 <우리 공주님 사랑해 >라는 말을 매일같이 들으며 아빠 사랑을 듬뿍 받으며 귀하게 자랐다.


김민지 실장은 어려서부터 사랑받는 아이였으며 또한 명석한 두뇌로 공부가 취미였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늘 반장을 했고 항상 수학경시 대회나 각종 대회를 나가면 1등이었고 칭찬을 듬뿍 받으며 뭐든 1등을 못 하면 밤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경쟁심과 자존감은 끝도 모를 만큼 켜졌다.


최고 행복한 가정이고 행복한 아이라 생각하며 자신감 만땅 으로 자랐다.

지금 생각하면 인간의 행복과 만족감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절대적인 비교 상대가 없거나 적을 때 행복지수는 높아지는 것 같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재 폐쇄국가인 북한에서 열린 세상을 볼 기회도 없고 세뇌 교육 덕에 오직 북한이라는 나라가 최고인 줄 알고 거기서 최고가 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사니 그럴 수밖에.


어찌 됐든 노력과 열공의 대가로 대학 예비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그녀에게 북한 최고의 대학으로 갈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


평양ㅇㅇㅇ대학이 1순위

원산 6년제 경제대학이 2순위

3순위가 교사였다. 경제 공부와 은행 쪽 일을 하는 것이 그녀의 소망이었다.


누구나 평생 배움의 기회를 누릴 수 있고 맘만 먹으면 대학 졸업은 꿈이 아닌 남한과 달리 북한에서의 대학 진학이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두 대학은 공부를 잘해야 하는 것은 물론 집안이 재력과 권력이 있어야만 입학할 수 있었다. 온전히 실력으로 합격한 최고의 대학이었지만 찰나 사고로 몸져누운 아버지 그리고, 여자임에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어머니. 할머니와 동생을 뒤로 한 채 혼자서 꿈을 쫒을 수는 없었다.

“미안한데 3번째 지망대로 선생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몸져누운 아버지를 뒤로하고 그녀의 엄마가 조심스레 말을 건넬 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학에서 교사 공부를 시작하였을 때쯤 그녀의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시작되는 시련 그럼에도 희망을 싹틔우다>

“내겐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었어요. 부모의 마음은 다 같다지만 아빠가 제게 준 사랑은 그 어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제가 평생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원동력이었어요. 아빠가 제게 주신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 없을 것”이라며 김민지씨는 아버지를 회상했다.

어려움을 이겨내며 대학을 마무리할 때쯤 갑작스러운 엄마의 재혼 소식이 들려왔다.

그녀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향으로 향했으며 문제의 의붓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문제가 있는 사람 같아 보였어요. 부지런하지 못하고 말만 번지르르한 나쁜 남자 스타일? 여하튼 엄마는 뼈 빠지게 일하는데 정작 새아빠라는 사람은 집에서 신문이나 보고 매일 술 마시고 성인 돼서 가족까지 이룬 본인 자식들까지도 일하지 않고 우리 엄마 등쳐먹고 살고 그랬으니깐요.


그뿐 아니라 우리 집에서 살면서 엄마가 번 돈으로 생활하며 내 동생은 물론 내 할머니를 괴롭히기까지 했어요. 이혼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지만 엄마는. 그래도 심성은 착한 사람이라며 걱정하지 말고 공부를 마치라고 하셨죠. 그땐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험한 세상에서 연약한 여자 혼자 애 둘 키우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고 외롭고 버거운 삶이었을지. 마음의 의지라도 하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 여자의 마음. 지금에야 비로소 충분히 이해되죠. 하지만 그땐 조금의 원망도 있었어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그래도 교사가 되면 괜찮은 삶을 살 것이라는 희망 하나로 버텨냈다. 남한에서는 교사의 교권침해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극한 직업에 속할 만큼 스트레스받는 직업인 반면 북한은 높은 급여와 함께 교사에 대한 존중이 무척 높은 곳이어서 충분히 존경받으며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대학 시절 인민반 100~200명이상 모인 자리에서 강연도 여러 차례 진행하였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탈북하면 안 된다는 강의였습니다. 중국에 가면 손 다리 잘린 상태에서 돼지처럼 먹고살게 된다는 동영상 자료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 외의 각종 자료를 가지고 탈북하면 남아 있는 가족이 불이익을 당한다고 강의를 했죠. 남한에 대한 부정적인 세뇌 교육이 강연의 주요 내용이었죠.


실제로 이때는 내가 당한 것이 아니니 먹고 살기 어려워 탈북하는 사람들과 여러 이유로 피치 못하게 고향을 등지고 탈북하는 분들에 대해 정말 이해를 못 했어요. 물론 북한의 세뇌 교육의 결과였고 괜찮은 집안 형편에서 남부럽지 않게 키워주신 부모님 덕분에 남들이 당하는 고생을 알려고도 안 한 교만 때문이었겠죠. 결국, 내가 한 말에 내가 당한 셈이죠. 저도 결국은 탈북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


사람은 뭐든 내가 직접 당해봐야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아요. 그 어느 누가 피치 못한 사정이 아니면.. 오죽했으면 자기 조국 고향 자기 부모 가족 친척 등지고 목숨 걸고 영원히 못 볼 기약 없는 길을 선택할까요?”라며 되물었다.


“탈북민들에 대한 선입견보다 그들에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피치 못한 계기나 체제였으니, 그들도 꿈과 희망이 있었고 그 누구의 귀한 자식 소중한 가족이었음을 알아주시고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우리 사회가 선입견과 편견이 없는 좀 더 나은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입니다. ”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그녀. 북한의 교사 배치는 자신의 고향이거나 남편의 고향에 배정되는 방식. 당연히 연애경험이 없었던 그녀는 고향으로 배정되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한 탈북>


그렇게 1년여 동안 교사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때까지도 의붓아버지의 행패는 멈추질 않았고 어느 겨울날 그녀는 다시금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엄마. 왜 할머니가 이 추위에 집에 쫓겨나서 마당에서 지내야 해? 언제까지 동생 맞는 걸 볼 거야? 그냥 헤어져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엄마 편하게 해드릴게”

그녀의 눈물이 어린 하소연에 엄마 역시 마음을 다잡았다.


엄마는 드디어 자식들과 가정을 지키려고 단호히 이혼을 결심했고 의붓아빠에게 말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악몽의 밤이 바로 그 날이었다.


그녀로서는 모든 즐거움의 추억을 포맷시켜 버린듯한 착각이 들 만큼 끔찍한 겨울밤이었다. 엄마의 헤어지자는 말에 같이 죽자며 쥐약을 들여대는 의붓아버지를 향해 “당신이 뭔데 무슨 자격으로 우리 가족 학대하고 죽으려면 혼자 죽지 내 엄마한테 왜 같이 죽자고 해? 이건 우리 집이고 엄마 등쳐먹고 살던 당신이 나가주면 끝나는 거잖아!! ”


김민지씨는 속에 있던 말을 아낌없이 꺼내며 하소연했다.

잠시 그녀의 말을 듣는 듯하던 의붓아버지는 이내 문을 닫고는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들어왔다.


“의붓아버지 손에 휘발유와 라이터가 들려 있었어요. 눈은 이미 미친 듯이 흥분해 있었고 바닥과 벽에 휘발유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어요. 순식간에 집이 타들어 갔죠. 엄마와 할머니가 소리를 지르고 동생과 엄마가 불을 끄려 동분서주했어요.”


그러나,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움직여지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집은 타들어 가는데 귀에서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아무 생각도 없었고 한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요즘의 흔한 말로 멘탈이 나간 것이다.

“진짜 1도 예상 못 했어요. 설마 그렇게까지 나올 거라고는. 한 번도 두려움이나 무서움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는 나였지만. 그 순간 이후로. 정말 의붓아빠가 무서웠고 악마 같았어요. 그 사건 이후 나에겐 포맷된 기억이 너무나 많아요. 7년을 피아노 개인과외를 받았었는데. 지금 하나도 기억 안 나니 정말 신기하죠. 내생에 최악의 공포에 밤, 악몽의 밤이었어요. ”


내가 눈감고 귀 닫고 입 다물면 그 악마가 제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집안인데. 너무 착하고 순진한 엄마와 힘없는 할머니와 어린 동생. 내 가족 손끝 하나 다치지 못하게 지키고 싶었던. 그대로 보고 숨죽이고 살 수만은 없었던 20대 소녀.

 

김민지홈피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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