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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이름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전하는 석연서씨

페이지 정보

작성자
다홍남북결혼
조회
1,087회
작성일
23-02-13 01:0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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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말.

우리나라는 IMF라는 초유의 국가부도 사태를 겪게 된다.

대규모 실업과 대량의 부동산 매각과 금융 불안 등으로 모든 국민이 고통에 빠져있던 때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신용불량자가 속출하고 직업을 잃은 사람이 속출하던 1998년 가을.

북한은 식량 기근으로 굶어죽은 시체가 나돌고 그 시체를 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때 마침 갓 2살 된 아이와 함께 버티던 석연서씨.

그대로 버티다가는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탈북을 생각한 것은 본인의 죽음보다 아이를 살려야겠다는 엄마로서의 마지막 생명줄이었다.

11월의 영하 가까운 추운 날씨에 살아야 하기에 국경으로 향했다.

그들 앞에 드리운 건 넓은 압록강.

그러나 뒤는 굶어 죽거나 공개처형당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부둥켜 안고 살얼음 같은 강을 한발 한발 건너기 시작했다.

처음 무릎까지 차오르던 물은 한걸음 내디딜수록 점점 더 깊어 가고

살을 에는 추위는 온몸을 떨게 만들었다.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싶더니 이내 가슴을 넘어 목까지 올라왔다.

이대로 죽는 건 아닌지 싶었지만 어떻게든 버텨보겠다고 아이를 머리 위로 올린 채로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죽음의 경계선.

물은 이미 입과 코를 지나 머리까지 잠길 만큼 깊어졌다.

죽으면 아이도 끝이라는 생각에 최대한 호흡을 참아내며 거센 물살을 헤쳐나갔다.

그리고 그의 노력이 가상했던지 결국 힘겹게 도강에 성공했다.

 

그녀의 삶은 죽음의 경계에서 안정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숨을 돌린 그들은 무작정 불 켜진 집에 들어갔고 거기서 뜻밖의 행운을 만난 것이다.

조선족.

누군가는 그토록 싫어하는 그들이 친척이 있는 흑룡강성으로 보내주었다.

그렇게 흑룡강성의 친척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심정뿐이었다.

처음 만난 한국 분이 한국에 가지 않겠냐고 했음에도 북한에서 받은 쇠뇌 교육으로 인해 절대 안 간다고 했었다.

그렇게 6년여가 지나고 석연서씨는 고민이 쌓였다.

다름아닌 아들의 미래 때문이었다.

매번 위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한 교회에서 남한으로의 귀화를 권유했다.

이미 몇 년간 중국에서 생활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석연서씨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한국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국정원 조사를 마치고 하나원에서 3개월여간의 생활을 마친 석선녀씨.

그녀의 남한 생활은 한마디로 하자면 죽도록 일했다고 한다.

"일하면 돈을 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저 아이에게 맛난 것 먹이고 싶고 잘 입히고 싶어서 식당

일을 비롯해 노점상까지 해봤어요. 진짜 8년여간 365일 하루도 안 쉬고 일한 날도 있었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순수한 그녀를 대상으로 사기가 빈번하기도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자주 보지 못한 차들이 많이 다니는 것을 보고 자신의 가족도 차를 사고 싶어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결국 계약금 일부를 주고 현금 할부로 소형차를 구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에게 그러지 말고 트럭을 사서 장사를 하는 게 낫다며 자신의 차랑 바꾸자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달콤한 꾐.

그리고 아직은 세상 물정 모르는 북한 사람이었기에.

겨우 3-4백만 원 하는 트럭과 2천여만 원 하는 차를 물물교환하듯 교환해버리고 만 것이다. 뒤늦게

알고 돌려달라고 했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해버렸다고 한다.

지리도 모르고 아는 인맥도 없는 상태에서 바비큐통닭 노점에 나선 석연서씨와 가족.

 

조금 장사할만하면 단속반이 출동하고 안전한 곳은 유동인구가 없어 한두 개 팔지도 못한 날이 허다했다.


"기껏 요리했는데 팔리지 않으니 결국 식구가 눈물 젖은 통닭을 먹어야 했죠. 덕분에 지금도 닭고기는 진저리가 나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천만에 고생 끝에 조류독감이 왔다.

어렵사리 버티던 노점상조차 조류독감으로 인해 일은 하는데 돈은 한 푼도 못 버는 날이 많아지고 결국엔 일을 접고 다시금 살기 위해 아이를 위해 팔을 벗었다.

농수산시장에서 허드렛일을 봐주고 야간 택배일을 비롯해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고단한 삶을 살던 중 남북결혼정보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남북결혼 상담을 해보라고 하더라.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상대방의 인생을 도와주는 일이라서 시작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남북결혼 상담사.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어떻게 생각할까?

"인생의 반려자를 쉽게 때로는 어렵게 만나기도 하는데 제 일이 인연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 진심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일하고 있어요. 이제 아이도 가정을 이룰 나이가 되었고

즐기면서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엄마로서 성공적으로 아이를 지키고 키워냈고 이젠 커리어 우먼으로서 많은 인연을 맺어주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석연서씨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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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선녀 본부장이 석연서로 개명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